
들어가며: 2000억짜리 기계, 삼성도 줄 서게 만드는 회사의 정체
네덜란드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부분 풍차나 튤립을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여기, 반도체 업계의 판도를 바꾸는 어마어마한 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에서 만드는 기계 한 대의 가격은 무려 2,000억 원에 달하는데,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이 기계를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라고 합니다. 삼성의 회장까지 직접 네덜란드로 찾아가게 만들 정도니, 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라는 별명을 가진 이 장비는 바로 네덜란드의 ASML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노광 장비’입니다. 오늘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ASML이 어떻게 삼성전자, TSMC와 같은 거대 기업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슈퍼을’이 될 수 있었는지,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반도체 생산의 심장, ‘노광 공정’이란?
ASML의 대단함을 이해하려면 먼저 반도체 생산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반도체는 총 8가지의 복잡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단계가 바로 ‘포토 공정(노광 공정)’입니다. 이 단계는 전체 생산 기간의 60%, 비용의 35%를 차지할 만큼 중요하죠. 쉽게 말해, 반도체의 원판인 웨이퍼 위에 아주 미세한 회로를 그려 넣는 과정입니다. 마치 필름 카메라가 빛을 이용해 사진을 인화하는 것과 원리가 비슷해요. 반도체 회로는 너무나도 작기 때문에 기계나 손이 아닌 ‘빛’을 쏴서 새겨 넣습니다. 웨이퍼에 감광액(빛에 반응하는 물질)을 바르고, 회로도가 그려진 ‘포토마스크’를 위에 올린 뒤 빛을 쬐면 원하는 패턴이 웨이퍼에 새겨지는 것이죠. 이 모든 과정을 수행하는 장비가 바로 ‘노광기’이며, ASML은 바로 이 핵심 장비를 생산하는 독보적인 기업입니다.

불안한 출발과 일본 기업의 그늘
지금은 세계 최강이지만, ASML의 시작은 매우 초라했습니다. 모기업인 필립스 연구소의 한 부서에서 출발했지만, 당시 연구소는 실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술 연구만 하고 상용화는 뒷전이었죠. 결국 이 프로젝트는 돈만 잡아먹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필립스로부터 정리 대상에 오릅니다. 필립스는 이 사업부를 매각하려 했지만 아무도 사지 않았고, 결국 네덜란드의 작은 반도체 장비 회사인 ASM과 5:5로 지분을 투자해 ASML을 설립하게 됩니다. 당시 노광 장비 시장은 일본의 니콘과 캐논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렌즈 제조 기술과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 기업들은 가격과 품질 모두에서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었죠. 제대로 된 제품 하나 없던 신생 기업 ASML에게는 그야말로 거대한 벽이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기술력으로 돌파하다
ASML은 정면승부 대신, 시장의 변화에 주목했습니다. 반도체 기술이 발전하면서 회로는 더욱 미세해지고 웨이퍼의 크기는 점점 커졌는데, 기존의 장비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죠. ASML은 당장의 제품은 없었지만, 웨이퍼와 포토마스크의 위치를 정밀하게 정렬하는 기술력 하나만큼은 뛰어났습니다. 이를 승부수로 삼아 차세대 장비 개발에 매달렸죠. 물론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개발이 늦어지면서 엄청난 손실을 봤고, 결국 모회사들이 모두 손을 떼면서 독립 기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도체 불황이 닥치면서 장비 주문이 지연되어 개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미국의 신생 반도체 기업들과 대만의 TSMC로부터 주문을 따내는 행운이 겹쳤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ASML은 1991년, 드디어 니콘과 캐논의 제품보다 기술력과 생산성 모두 뛰어난 신규 장비를 출시하며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EUV,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반지를 끼다
업계의 강자로 떠오른 ASML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미세한 회로를 새기려면 기존의 빛보다 파장이 훨씬 짧은 빛, 즉 ‘극자외선(EUV)’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2000년대 중반부터 EUV 장비 개발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빛은 파장이 짧아질수록 다루기가 극도로 어려워져 렌즈를 통과하지 못하고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초기 개발품은 가동률이 10%도 채 안 될 정도로 처참했지만, ASML은 10년간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쏟아부은 끝에 마침내 EUV 노광 장비 개발에 성공합니다. 그 결과, ASML의 시장 점유율은 90%에 육박하며 사실상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최첨단 반도체는 ASML의 EUV 장비 없이는 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ASML이 반도체 산업의 ‘슈퍼을’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결론: 기술에 대한 집념이 만든 반도체 제왕
혹독한 시장 상황 속에서도 눈앞의 이익이 아닌 차세대 기술에 모든 것을 걸었던 ASML. 그들의 뚝심과 집념은 EUV 장비라는 엄청난 결실을 낳았고, 이제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지배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반도체 관련 뉴스를 보실 때, 그 이면에는 네덜란드의 작은 회사에서 시작해 세계를 움직이는 ASML의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면 더욱 흥미로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