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2천억 원짜리 기계, 삼성을 줄 세운 네덜란드 회사의 정체
네덜란드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부분 풍차나 튤립을 생각하실 텐데요, 저는 아주 특별한 회사가 생각납니다. 이 회사에서 파는 기계 한 대는 무려 2천억 원에 달하지만, 사려는 기업들이 너무 많아 대기표를 뽑고 기다려야 할 정도죠. 삼성의 회장마저 직접 네덜란드로 찾아가게 만들 정도이니, 그 영향력은 상상 이상입니다. ‘이렇게 인기가 많으면 다른 곳에서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이 기계는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합니다. 이 엄청난 기계의 정체는 바로 네덜란드의 ASML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노광 장비’입니다. 오늘은 작은 회사였던 ASML이 어떻게 삼성전자와 같은 거대 반도체 기업들을 줄 세우는 ‘슈퍼 을’이 될 수 있었는지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2. 반도체에 회로를 새기는 ‘사진 기술’, 노광 공정의 비밀
ASML의 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반도체 생산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공정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단계는 바로 ‘포토 공정’입니다. 전체 생산 기간의 60%, 비용의 35%를 차지할 만큼 중요하죠. 이 공정은 마치 옛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원리와 비슷해서 붙은 이름인데요, 머리카락보다 훨씬 얇은 반도체 회로는 기계가 아닌 ‘빛’을 이용해 새겨 넣습니다.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 위에 빛에 반응하는 감광액을 바르고, 그 앞에 회로도가 그려진 ‘포토 마스크’를 놓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빛을 쬐면, 마스크를 통과한 빛이 웨이퍼 위에 정교한 회로 패턴을 그려내는 것이죠. 이 모든 과정을 수행하는 장비가 바로 ‘노광기’이며, ASML이 바로 이 노광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시장 점유율 90%, 특히 최첨단 반도체 제작에 필수적인 장비는 오직 ASML만이 만들 수 있어 사실상 독점이나 다름없습니다.

3. 필립스의 ‘애물단지’에서 시작된 험난한 여정
지금은 세계 최강이지만, ASML의 시작은 초라했습니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죠. 시작은 거대 기업 필립스의 연구 부서였지만, 당시 연구원들은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회사의 다른 부서는 외부 장비를 선호했습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돈만 잡아먹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필립스는 매각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죠. 그러다 네덜란드의 작은 반도체 장비 회사 ASM과 손을 잡고 5:5로 투자해 ASML을 설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시장은 니콘, 캐논과 같은 일본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뛰어난 렌즈 기술과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값싸고 품질 좋은 장비를 공급하며 시장을 휩쓸고 있었죠. 제대로 된 제품 하나 없던 신생 기업 ASML에게는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습니다.

4. 위기를 기회로! 행운과 기술력으로 이뤄낸 역전
ASML은 정면승부 대신, 당시 누구도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던 ‘차세대 기술’에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더 커지는 웨이퍼와 더 복잡해지는 회로에 대응할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죠. 물론 계획은 순탄치 않았고, 개발이 지연되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행운이 찾아옵니다. 1985년 반도체 불황으로 오히려 개발 시간을 벌게 되었고, 미국의 신생 기업들이 일본 장비와 다른 새로운 장비를 필요로 하면서 ASML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죠. 여기에 TSMC 공장 화재로 인한 장비 재주문까지 겹치며 기적적으로 위기를 탈출합니다. 이후 ASML은 기술 개발에만 매달렸고, 2001년 생산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킨 ‘트윈스캔’ 기술을 선보이며 마침내 일본 기업들을 추월하고 업계 1위로 올라서게 됩니다.

5.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궁극의 빛’, EUV 기술의 탄생
ASML이 진정한 ‘넘사벽’ 기업이 된 것은 바로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개발에 성공하면서부터입니다. 반도체 회로를 더 가늘게 그리려면 빛의 파장이 짧아야 하는데, EUV는 파장이 너무 짧아 다루기가 극도로 어려운 ‘궁극의 빛’이었습니다. 렌즈에 그냥 흡수되어 버릴 정도였죠. 초기 개발품은 가동률 10% 미만, 시간당 웨이퍼 1장을 생산하는 처참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ASML은 10년이 넘는 시간과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쏟아부은 끝에 마침내 EUV 장비 상용화에 성공합니다. 이 덕분에 ASML의 점유율은 90%를 넘어서며 현재의 독점적인 지위를 굳혔습니다. 혹독한 시장 상황 속에서도 차세대 기술에 과감히 투자하고 돌파해 온 기업, ASML. 이들의 혁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최첨단 기술이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