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서론: 지상낙원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나라’를 꼽으라면 많은 분들이 주저 없이 뉴질랜드를 떠올립니다. 압도적인 자연경관, 높은 삶의 질, 안정된 사회.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곳이죠.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파라다이스에 지금 믿을 수 없는 균열이 생기고 있습니다. 바로 뉴질랜드의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가장 똑똑하고 젊은 인재들이 기록적인 숫자로 나라를 탈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 이주가 아닌 ‘엑소더스’에 가까운 이 현상, 대체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2. 경제 구조의 숙명: 규모와 거리라는 족쇄
뉴질랜드의 딜레마를 이해하려면 ‘규모’와 ‘거리’라는 두 가지 숙명적 키워드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인구 약 530만 명이라는 작은 ‘규모’의 한계입니다. 이는 호주의 시드니 도시 하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내수 시장이 너무 작아 글로벌 기업이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둘째는 광활한 태평양 한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거리’의 문제입니다. 지리적 고립은 모든 물류 비용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여 제조업과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켰습니다. 결국 뉴질랜드의 산업은 농업, 관광업, 그리고 내수 서비스업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커리어의 폭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3. 진짜 이유: ‘싼 집’이 아닌 ‘더 많은 기회’를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높은 집값을 인재 유출의 주범으로 꼽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놓친 것입니다. 놀랍게도 뉴질랜드를 떠나는 청년들의 절반 이상이 향하는 곳은 바로 옆 나라 호주입니다. 그런데 시드니, 멜버른 같은 호주 대도시의 집값은 뉴질랜드 오클랜드보다 훨씬 비쌉니다. 만약 비싼 집값이 유일한 이유였다면 호주는 최악의 선택지인 셈이죠.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싼 집’이 아니라 ‘더 많은 기회’였습니다. 뉴질랜드의 제한된 산업 구조에서는 찾기 힘든 전문직, 첨단 기술 분야의 연구직, 글로벌 기업의 관리직 같은 양질의 일자리가 거대한 호주 경제에는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임금과 성장 가능성을 찾아 대도시로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뉴질랜드의 비극은 그 대도시가 자국이 아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있다는 점입니다.

4.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 호주로 향하는 특별한 문
왜 유독 호주일까요? 그 비밀은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트랜스-타즈만 여행 협정(Trans-Tasman Travel Arrangement)’에 있습니다. 이 협정 덕분에 뉴질랜드와 호주 시민은 여권만 있으면 비자 같은 복잡한 절차 없이 서로의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고, 일하고, 집까지 살 수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까지 거의 완벽하게 똑같은 환경에, 평균 임금은 호주가 20\~40% 더 높으니 뉴질랜드 청년들에게 호주로 가는 것은 ‘해외 이민’이라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더 좋은 직장이 있는 옆 동네로 이사 가는 것’과 심리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에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들이 모여, 국가 전체적으로는 가장 소중한 자산인 ‘두뇌’를 유출시키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있습니다.

5. 딜레마: 빠져나갈 수 없는 악순환의 함정
진짜 문제는 이 흐름이 스스로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는 점입니다. 뉴질랜드는 떠나간 인재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숙련 이민자를 유치합니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뉴질랜드를 영원한 정착지가 아닌, 호주로 가기 위한 ‘디딤돌’로 여깁니다. 뉴질랜드 시민권을 취득하는 순간 호주로 가는 문이 활짝 열리기 때문이죠. 결국 뉴질랜드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들여 이민자를 유치하고 정착을 돕지만, 정작 그들이 사회에 가장 크게 기여할 시기가 되면 그 결실은 옆 나라 호주가 손쉽게 가져가는 ‘호주행 뒷문’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너무 깊이 얽혀 있어 호주와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을 수도 없는 상황. 뉴질랜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라 자체의 매력도를 높이는 것이지만, 이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는 거대한 과제입니다. 지상낙원의 깊은 딜레마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마주할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