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서론: 중국을 지배하는 붉은 유령, 마오쩌둥
2025년 12월, 중국은 여전히 한 남자의 유령 아래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천만 명 이상을 굶겨 죽이고 수백만 명을 학살했음에도 국부로 추앙받는 남자, 바로 마오쩌둥입니다. “공적은 7할이요, 과오는 3할”이라는 평가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당신이 몰랐던 마오쩌둥의 이야기, 그 붉은 역사의 페이지를 아주 낱낱이 넘겨보겠습니다.

2. 혁명가의 탄생: 가난을 딛고 일어선 반항아
1893년, 흔히 알려진 가난한 농민의 아들과 달리 마오쩌둥은 자수성가한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지독한 구두쇠였던 아버지의 억압과 강제 결혼은 어린 마오에게 깊은 반항심을 심어주었죠. 18세, 그는 신해혁명에 참여하며 혼란한 중국에서 서구 사상에 눈을 뜨고 혁명가의 꿈을 키워나갑니다. 이후 베이징대학교 도서관에서 중국 공산주의의 선구자 리다자오를 만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매료되고, 오사 운동을 통해 행동하는 혁명가로 거듭납니다. 1921년, 27세의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창당 멤버로 이름을 올리며 거대한 역사의 서막을 엽니다.

3. 피의 권력 쟁취: 잔혹함과 비정함으로 쌓아 올린 제국
초기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무자비하게 탄압받았고, 마오는 도시 대신 농촌에서 농민들을 규합하는 전략을 택합니다. 하지만 진강산으로 숨어든 그는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AB단 숙청 사건’을 일으키며 잔혹한 본성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자신을 지키려다 국민당에게 총살당한 첫 아내 양카이후이가 죽어가는 동안, 마오는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낳는 비정함을 보였습니다. 12,000km에 달하는 지옥 같은 대장정을 거치며 그는 당의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 중일 전쟁 때는 국민당이 일본군에 갈려나가는 동안 뒤에서 세력을 불리고 아편 무역으로 군자금을 마련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1949년,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며 붉은 황제로 등극합니다.

4.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
황제가 된 마오쩌둥은 경제에 서툴렀습니다. 1958년, 그는 중국을 초고속으로 산업화하겠다며 ‘대약진 운동’을 시작했지만, 농기구까지 녹여 고철 덩어리를 만들고, 개인의 토지와 가축을 빼앗는 공동 농장 시스템으로 생산성은 바닥을 쳤습니다. 심지어 참새를 해로운 새로 규정하며 ‘제사해 운동’을 벌여 메뚜기 떼 창궐을 야기했고, 결국 3천만 명 이상이 굶어 죽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불러왔습니다. 권력 일선에서 물러났던 마오는 1966년, 73세의 나이로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다시 권력을 되찾으려 합니다. 홍위병을 선동하여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지식인들을 학살했으며,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등 광기의 시대가 10년간 이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마오에게 선물 받은 망고를 성물로 모시고 숭배하는 등 그를 신격화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5. 붉은 황제의 은밀한 사생활과 끝나지 않는 유령
마오쩌둥의 개인 주치의 리즈수의 회고록은 그의 충격적인 사생활을 폭로합니다. 그는 평생 양치질을 하지 않았고, 60대가 넘은 나이에도 어린 소녀들을 탐닉했으며, 여성들을 도구나 세면 취급하는 등 극도로 문란하고 비위생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1976년, 그는 성병을 달고 살았던 붉은 황제의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마오의 죽음과 함께 문화대혁명도 막을 내렸지만, 중국은 여전히 그의 유령 아래 놓여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철저한 정보 통제와 세뇌, 그리고 빈부격차에 좌절한 젊은 세대의 현실 도피는 마오를 국부로 숭배하게 만듭니다. 공산당 역시 마오를 부정하는 순간 정통성이 무너진다는 이유로 그의 과오를 교묘하게 왜곡합니다.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문명을 파괴한 독재자이자, 동시에 외세에 짓밟히던 중국을 통일하고 강대국의 기틀을 다진 창업군주. 마오쩌둥의 극단적인 삶은 2025년 시진핑 체제를 지탱하는 강력한 기둥으로 남아있습니다. 과연 중국은 언제쯤 이 붉은 유령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