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 잊혀진 전쟁, 그러나 우리의 운명
베트남 전쟁의 아픔을 넘어, 우리에게 더욱 가깝고 처절했던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얼마나 체감하고 계신가요?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지만, 우리에게 6.25 한국 전쟁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민족 최대의 비극입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1129일 동안 이어진 이 비극은 약 400만 명의 사상자를 낳았고, 강대국들의 체스판 위에서 말이 되어야 했던 한반도의 운명, 젊은이들의 피눈물, 그리고 전쟁 속에서도 삶을 이어갔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교과서적인 요약을 넘어, 그날의 포성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하려 합니다.

분단의 시작, 38도선과 이념의 불씨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은 하루를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소련군과 미군이 들어섰고, 단 30분 만에 지도 위에 그어진 북위 38도선은 우리 민족의 허리를 영원히 끊어놓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꼭두각시로 김일성이 권력을 잡았고, 남한은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익의 극심한 혼란과 테러가 이어지며 내전의 불씨가 타올랐습니다. 결국 남북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이념의 화약고로 변해갔고, 김일성은 한반도 전체의 1인자가 되려는 야욕으로 전쟁을 결심하게 됩니다.

스탈린의 승인과 폭풍 같은 남침
김일성은 스탈린을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미국을 두려워한 스탈린은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중국의 공산화, 소련의 핵개발 성공, 그리고 미국의 애치슨 라인 발표라는 세 가지 결정적 사건이 스탈린의 마음을 바꿨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했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쟁을 허락했지만, 미국의 개입 시 중국에 도움을 청하라는 교활한 조건을 달았습니다. 소련의 최신 T-34 탱크와 전투기로 무장한 북한군은, 국군의 1/3이 휴가 중이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장맛비 속에서 38선 전역을 침공했습니다. 국군은 탱크를 처음 보고 화염병으로 맞서는 등 처절하게 싸웠지만,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 인도교 폭파라는 비극까지 겪었습니다. 그러나 춘천을 3일간 지켜낸 국군 6사단의 영웅적인 방어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기적의 시간이었습니다.

낙동강의 사투,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의 기적
서울 함락 소식에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를 소집, 역사상 최초의 유엔군이 결성되어 한국으로 파병되었습니다. 하지만 초반 미군 역시 T-34 탱크 앞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결국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까지 밀려났습니다. 국토의 90%를 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키거나 죽거나”라는 워커 사령관의 명령 아래, 대구 다부동 전투 등 낙동강 전선에서 처절한 사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때 메가더 장군은 상륙작전의 무덤이라 불리던 인천을 향한 기상천외한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유진 클라크 대위의 첩보 활동과 학도병들의 장사리 상륙작전이라는 양동 작전 덕분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허리가 끊긴 북한군은 낙동강의 유엔군과 국군에게 포위 섬멸당했습니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며 통일의 희망이 피어올랐습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길고 긴 휴전의 협상
통일을 눈앞에 둔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했지만, 우리는 거대한 변수를 간과했습니다. 바로 중국의 개입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순망치한’을 외치며 30만 대군을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파병했습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밤마다 몰려왔고,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열 배가 넘는 적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10만 명의 피난민을 태운 흥남철수라는 감동적인 작전도 펼쳐졌죠. 서울을 다시 내주는 1.4 후퇴를 겪은 후, 전선은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화되었고, 밀고 밀리는 고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포로 송환 문제 등으로 인해 2년간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 없는 휴전에 결사반대하며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결국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의 끝, 그리고 끝나지 않은 기억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되고 12시간 뒤 모든 총성이 멈췄습니다. 3년 1개월 2일, 1129일간의 비극이 잠시 멈춘 순간이었습니다.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희생자와 전쟁 고아들을 남겼지만, 폐허 속에서도 우리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국제 사회의 도움과 우리 민족의 투지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유일한 국가로 성장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휴전선 155마일에는 남북의 젊은이들이 총을 겨누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잠시 멈춘 휴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16개국 195만 명의 유엔군 참전 용사들과 수많은 국군 장병, 학도병들을 기억할 때, 진정한 평화가 지켜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