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동의 70년대, 사무실 하나에서 시작된 전설
드라마 과 에서 그려진 상사맨들의 열정적인 이야기가 현실이 된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1970년대 한국 경제사에 혜성처럼 등장해 ‘무서운 젊은이들’이라 불리며 파란을 일으켰던 율산그룹입니다. 1971년, 신선호 회장은 서울대 동창들과 함께 자본금 500만 원으로 율산실업을 창업합니다. 당시 고층 빌딩이 흔치 않아 남대문 그랜드 호텔의 한 객실을 사무실 삼아 시작된 이들의 도전은, 내수 시장의 포화를 직시하고 오직 수출만이 답이라 확신한 젊은 기업가 정신의 발현이었습니다. 마침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국내에 쌓여있던 시멘트와 철근 같은 건축 자재를 중동에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이는 율산그룹 성공 신화의 서막이었습니다.

기발함이 낳은 기적: 중동 수출 신화를 쓰다
수출 초창기, 한국의 낮은 신용도로 인해 신용장 확보가 어려웠고, 중동 항만의 열악한 하역 시설은 만성적인 지연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율산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장했습니다. 해운 선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배를 빌려 빠른 하역을 실현했으며, 심지어 사우디 항만법의 맹점을 이용해 선실에 불을 내어(실제 화재가 아닌 연기만 피워) 긴급 정박 후 우선 하역을 감행하는 대담함까지 보였습니다. 이는 ‘율산 신화’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파격적인 성공을 가져왔습니다. 첫해 340만 달러 수출을 시작으로, 1976년에는 4,300만 달러, 1977년에는 1억 6천만 달러를 수출하며 동탑, 은탑, 금탑 무역 훈장을 연달아 수상하는 등 한국 재계의 신데렐라로 급부상했습니다.

거침없는 확장과 정권의 특혜가 만든 신데렐라
율산그룹의 폭발적인 성장은 탁월한 사업 수완뿐만 아니라 당시 박정희 정권의 ‘수출 보국’ 정책에 따른 파격적인 특혜에도 힘입었습니다. 특히 신용장만 있으면 사업 완료 전에도 연 6%의 저리로 현금을 대출받을 수 있었던 ‘무차별 대출’은 연 25%에 달하던 고금리 시대에 막대한 이자 수익을 보장했습니다. 이를 발판 삼아 율산은 신진 알루미늄 인수, 율산 건설, 율산 전자 설립 등 제조업과 건설업으로 사업 영역을 급격히 확장하며 창업 4년 만에 14개 계열사와 8천 명의 직원을 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부지를 매입한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투자였지만, 훗날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행운의 여신이 외면하다: 추락하는 거인의 그림자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율산그룹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1978년 사우디 유통업 적발 및 이로 인한 ‘사우디 철수설’ 괴소문은 단기 자금 시장의 자금 회수를 촉발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건축 자재 수출 금지 조치와 ‘8.8 부동산 투기 억제 조치’는 율산의 주력 사업과 터미널 부지에 묶인 자금을 압박했습니다. 또한 주거래 은행의 부실 기업 인수를 조건으로 한 자금 지원 요구는 율산의 부실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급기야 1979년 1월, 신선호 회장의 청와대 고위직 사칭 납치 사건과 그에 대한 청와대의 분노가 더해지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그해 4월, 신선호 회장이 횡령 및 외환 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율산그룹은 설립 4년 만에 부도 처리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율산 신화의 교훈과 재기의 빛
율산그룹의 몰락은 자기 자본 없이 은행 대출에 전적으로 의존한 무리한 외형 확장과 단기 자금을 장기 고정 지출에 사용한 관행적 경영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부도 당시 율산의 자본금 98억 원 대비 은행 부채는 1,523억 원에 달했으며, 이는 부실 경영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율산그룹의 부도 속에서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부지는 서울시의 계약 조항 덕분에 마지막 자산으로 남아 신선호 회장의 재기 발판이 됩니다. 그는 이 부지를 바탕으로 센트럴 시티(JW 메리어트 호텔 등)를 성공적으로 개발하며 화려하게 재기, 현재 1조 원 이상의 자산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율산그룹의 흥망성쇠는 1970년대 한국 경제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현대 기업인들에게도 무리한 확장이 아닌 견고한 기본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