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상치 않은 환율 움직임, 정부와 기업의 엇갈린 시선
최근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는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기획재정부 차관 주재로 주요 수출 대기업 재무담당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 바로 1480원을 돌파하며 불안하게 요동치는 환율 때문입니다. 정부는 기업들에게 외환시장에 달러를 공급해달라며 ‘환헤지’ 확대를 요청했습니다. 기업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선물환 매도를 통해 시장에 풀면 단기적으로 환율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기업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국가 경제와 민생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정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각자의 상황을 고려하며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과연 이처럼 정부와 기업의 시선이 엇갈리는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단순한 달러 수급 문제를 넘어선 깊은 고민이 숨어 있습니다.

정부의 필사적 노력, 시장은 왜 움직이지 않는가?
정부는 환율 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동원했습니다. 기업들에게 외화 보유액을 풀도록 요청하고, 은행들의 외화 유동성 스트레스 테스트를 유예하며 달러를 쌓아두는 규제를 일시적으로 완화했습니다. 심지어 국민연금까지 동원해 650억 달러 규모의 외환 스와프 계약을 연장하며 시장에 달러 공급 여력을 늘리려 했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기업들은 달러를 시장에 내놓았지만, 최근 들어 기업들의 달러 예금 잔액은 약 21% 급증하며 달러를 쌓아두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율은 좀처럼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시장이 더 이상 정부의 단기적인 수급 조절만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과거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정부의 요구에 응했던 기업들이 오히려 더 큰 희생을 강요당했던 쓰라린 경험이 기업들의 ‘달러 사재기’ 심리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숫자를 넘어선 질문: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신뢰
현재 한국의 외환 보유액은 약 4306억 달러로,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의 200억 달러와 비교하면 20배가 넘는 규모입니다. 숫자로만 보면 충분해 보이지만, 시장은 단순히 규모만을 보지 않습니다. 외환 보유액의 약 90%가 국채나 회사채 같은 유가증권 형태로 운용되고 있어, 위기 시 현금화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수출 중심 경제 구조의 한계, 저출생 고령화로 인한 내수 시장 축소, 잠재 성장률 하락 등 구조적인 문제들이 원화 가치를 지탱할 힘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한국의 잠재 성장률이 2% 미만으로 떨어졌고, 2040년대에는 0%대까지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외국인 투자자들을 한국 시장에서 멀어지게 하고, 기업들조차 미래를 대비해 달러를 움켜쥐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정책의 효과보다는 경제의 근본적인 체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신뢰 회복의 길
정부의 다양한 외환 시장 안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요지부동인 현상은, 우리가 단순한 유동성 문제가 아닌 ‘신뢰의 위기’에 직면했음을 시사합니다. 과거의 쓰라린 경험이 정부와 기업 간의 신뢰를 약화시켰고,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시장 참여자들은 합리적으로 각자의 달러를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임시방편적인 조치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숫자로 가늠할 수 없는 한국 경제의 ‘체력’과 ‘신뢰’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해법입니다. 수출 대기업들이 달러를 국내로 들여오고, 금융기관들이 외화 유동성을 확보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모여 시스템을 바꾸고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 모두가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어떤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4300억 달러가 넘는 외환 보유액이 진정한 가치를 발하려면, 그 기저에 굳건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