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평화를 향한 오만과 오판: 소말리아 개입의 시작
영화 의 숨 막히는 장면들은 단순한 스크린 속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1993년 10월 3일, 소말리아 모가디슈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군사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비극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고가 아닌, 그 이면에 복잡한 역사적 배경과 외세의 오만한 판단이 깔려 있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극심한 가뭄과 기아, 그리고 독재 정권의 폭정으로 신음하던 소말리아는 냉전 종식 후 군벌들의 무한 경쟁 속에서 무법천지로 변모했습니다. 특히 파라 아이디드 장군은 UN의 구호 식량마저 약탈하며 권력의 수단으로 삼았고, 이에 분노한 국제사회는 미국을 필두로 한 UN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초기 미 해병대는 ‘희망 회복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비교적 순조로운 상륙과 군벌들의 위장된 휴전을 목격하며 낙관적인 전망을 가졌으나, 이는 곧 닥쳐올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2. ‘델타 포스’와 ‘레인저’: 특수부대 투입, 그러나…
미 해병대가 철수하자, 아이디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UN 평화유지군을 공격하고 구호품을 강탈하며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심지어 파키스탄군을 함정에 빠뜨려 24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충격적인 사건까지 벌어졌죠. 이에 격분한 미국은 아이디드를 ‘적색 수배자’로 지정하고, 그를 생포하거나 사살하기 위해 최정예 특수부대인 ‘델타 포스’와 ‘레인저’ 부대 450명을 소말리아에 급파합니다. 당시 워싱턴은 걸프전 승리의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었고, 특수부대가 단기간에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신감은 현지 사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만이었습니다. 아이디드의 정확한 위치 파악에만 5주가 걸렸고, 그마저도 번번이 실패하며 작전은 아이디드의 부하들을 체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습니다. 급기야 정보원의 제보를 토대로 한 ‘아이린 작전’은 대낮에 모가디슈 시내의 무기 암거래 시장으로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대담한, 그러나 위험천만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3. 대낮의 악몽: ‘블랙 호크 다운’의 비극
1993년 10월 3일 오후 3시 30분, 모가디슈는 대낮의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헬기에서 레펠링하던 레인저 대원의 추락이라는 불길한 시작과 함께 작전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현지인들이 씹는 각성제 ‘까트’는 주민들을 흥분시켰고, 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오인한 수많은 소말리아인들은 집집마다 총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델타 부대는 간신히 표적을 체포했지만, 호위 헬기 블랙 호크가 RPG(로켓 추진 유탄)에 명중되어 추락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어진 두 번째 블랙 호크 추락과 함께 미군은 깊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불과 1시간으로 예상했던 작전은 통제 불능의 전면전으로 번졌고, 플랜 B조차 없던 미군은 고립된 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필사적인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탄약은 바닥나고, 구조대는 바리케이드를 뚫지 못해 헤매는 지옥 같은 밤이 이어졌습니다.

4. 참혹한 대가와 뼈아픈 교훈
다음 날 새벽, 파키스탄과 말레이시아 UN군 기갑부대의 지원으로 간신히 고립된 미군 대원들은 구출되었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미군 18명이 전사하고 7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소말리아 민간인 또한 최소 300명에서 최대 1,0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특히 아이와 여성들까지 총을 들고 싸우거나 총탄에 희생되는 비극적인 상황은 전쟁의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소말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UN군 또한 뒤를 이었습니다. 국제사회의 개입이 중단된 소말리아는 다시 무법천지로 돌아갔고, 이는 현대사에서 개입주의와 고립주의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블랙 호크 다운’은 단순히 군사적 실패를 넘어, 외세의 개입이 현지 문화와 정치, 민심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