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에펠탑을 싫어한 작가, 고층 건물을 싫어하는 유럽
프랑스의 유명 작가 기 드 모파상은 아주 특별한 점심 식사 장소가 있었습니다. 바로 에펠탑 안에 있는 레스토랑이었죠.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이곳을 고집한 이유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화는 유럽인들이 고층 건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유럽은 전 세계 GDP의 21%를 차지하는 부유한 대륙이지만, 전 세계 고층 빌딩의 단 3%만이 이곳에 서 있습니다. 한국의 고층 빌딩 수(281개)가 유럽 대륙 전체(약 200여 개)보다 많을 정도니까요. 어째서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수없이 배출한 유럽에는 유독 높은 건물이 드문 걸까요?

2. 수백 년의 역사, 고층 빌딩이 필요 없었던 도시
유럽 도시의 역사는 아주 먼 과거,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시작됩니다. 신전과 광장을 중심으로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확장되었죠. 파리, 로마, 런던 같은 도시들은 지난 2,000년간 인류가 만들어온 모든 건축 양식이 겹겹이 쌓인 거대한 박물관과도 같습니다. 반면, 고층 빌딩의 시대는 19세기 미국 시카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혁신적인 방법이었죠. 중국, 한국, 동남아 등 짧은 시간에 급격한 도시화를 겪은 나라들도 같은 이유로 고층 빌딩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은 달랐습니다. 도시는 아주 천천히 성장했고, 공간이 부족해지면 방어 기능을 잃은 낡은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500년 이상 된 문화유산을 허물고 굳이 높은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3. 전쟁의 상처와 되찾고 싶었던 문화적 자존심
사실 유럽도 고층 빌딩으로 가득 찰 뻔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직후였죠. 유럽은 미국처럼 현대적인 고층 빌딩을 지을 것인지, 아니면 폐허가 된 과거를 복원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유럽인들의 선택은 ‘복원’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건물 재건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으로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이었죠. 특히 대성당을 되살리는 일은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미국에 대한 은근한 문화적 경쟁 심리도 작용했습니다. 미국이 ‘혁신과 진보’의 상징으로 마천루를 내세우며 유럽을 낡은 체제로 깎아내릴 때, 유럽인들은 오히려 고층 빌딩을 도시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저급한 건축’으로 여기며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려 했습니다.

4. ‘브뤼셀화’의 교훈과 보이지 않는 규제
유럽이 역사 보존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히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브뤼셀화(Brusselization)’라는 현상인데요, 20세기 중반 EU의 수도가 된 브뤼셀이 국제기구를 유치하기 위해 역사적인 건축물을 무분별하게 철거하고 현대적인 고층 건물을 지으면서 도시의 정체성을 파괴했다는 엄청난 비난을 받은 사건입니다. 이 일을 교훈 삼아 유럽의 도시들은 저마다 아주 엄격한 건축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파리는 지금도 도심에 12층 이상 건물을 지을 수 없고, 런던에서는 어떤 건물이든 세인트 폴 대성당이나 빅벤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마치 하늘에 닿으려는 ‘바벨탑 경쟁’처럼 세계 최고 높이 경쟁을 벌이는 다른 나라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이미 세계적인 선진국인 유럽은 굳이 높이로 국가적 위상을 과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5. 전통과 현대의 조화, 유럽 도시의 미래는?
물론 고층 건물에 부정적이던 유럽의 태도도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삭막한 직사각형 상자 같던 고층 빌딩들이 세련되고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은 역사 지구와 현대 건축 지구가 섞이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파리의 ‘라데팡스’나 런던의 ‘시티 오브 런던’처럼, 도심 외곽에 고층 건물 밀집 지역을 따로 두는 방식이죠. 앞으로도 유럽의 도시화는 계속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오래된 건물들로 가득한 도심에도 고층 빌딩이 하나둘 등장할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유럽이 지켜온 전통적인 스카이라인과 현대적인 고층 건물이 어떻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나갈지, 그들의 지혜로운 선택이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