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공룡 우버를 이긴 동남아의 작은 거인, 그랩 이야기
우리에게 ‘택시 호출 앱’이란 카카오택시를, 해외에서는 ‘우버’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북미와 유럽에서는 우버가 거의 모든 교통의 표준처럼 자리 잡았죠. 하지만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리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집니다. 그곳의 사람들의 스마트폰에는 어김없이 초록색 ‘그랩(Grab)’ 앱이 깔려있습니다. 심지어 막강한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우버가 동남아 시장에 진출했다가 막대한 손실만 입고, 결국 사업을 접은 채 그랩의 지분만 받고 철수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오늘은 재벌 3세라는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동남아의 지도를 바꾼 한 창업가의 이야기와, 글로벌 공룡과 로컬 플랫폼의 치열했던 전쟁을 통해 그 비밀을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재벌 3세, 약속된 길을 버리고 거리로 나서다
그랩의 창업자 앤서니 탄은 말레이시아 자동차 재벌 ‘탄총 모토’ 그룹의 3세로,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까지 졸업한, 모두가 부러워하는 ‘다이아몬드 수저’였습니다. 졸업 후 가업을 물려받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죠. 하지만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하버드 재학 시절 들었던 한 친구의 이야기였습니다. 택시 기사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 여성이 아무런 보호도, 해결책도 찾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신원 확인도, 운행 기록 추적도 불가능한, 피해자만 있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시장. 당시 동남아의 택시 시장은 미터기를 켜지 않는 것은 물론, 여성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바가지요금이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앤서니 탄은 이 거대한 사회적 문제 속에서 기회를 보았습니다. 그는 보장된 부와 명예 대신,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2012년 ‘마이택시’라는 작은 앱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랩의 위대한 시작이었습니다.

현장의 목소리에 답이 있었다: 기사들을 설득하다
야심 찬 꿈과 달리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앤서니 탄과 공동창업자 탄호이링은 직접 거리로 나가 택시 기사들을 만나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길에서 손만 흔들면 타는 게 택시인데, 누가 굳이 앱을 쓰겠냐”는 냉담한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때 앤서니는 중요한 전략을 선택합니다. 그는 기사들을 단순한 설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진짜 고충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회사에 내는 높은 수수료, 손님을 찾기 위해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 현금 수입의 위험성 등 기사들이 겪는 불합리함을 함께 짚어주고, 이 앱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도구임을 진심으로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기사들을 통해 작은 성공 사례를 만들고, 직원들이 직접 승객이 되어 시스템이 ‘돈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진심은 통했고, 기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며 시장의 분위기는 서서히 그랩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버의 ‘공식’을 깨뜨린 그랩의 ‘현지화’ 전략
그랩이 동남아 시장에 뿌리를 내릴 무렵, 2013년 마침내 글로벌 공룡 우버가 상륙합니다. 막대한 자본을 무기로 승객에게는 파격적인 할인 쿠폰을, 기사에게는 높은 보너스를 지급하는 ‘출혈 경쟁’은 우버의 필승 공식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싸움의 승자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버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은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이었죠. 신용카드 보급률이 낮은 시장에서 카드 결제만 고집하고, 오토바이가 주요 교통수단인 도시의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그랩은 철저히 ‘현지화’에 집중했습니다. 각국 정부 및 택시 회사와 손을 잡고 제도권 안으로 들어갔고, 신용카드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현금 결제’를 유지했습니다.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 현실을 감안해 채팅에 ‘자동 번역’ 기능을 넣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오토바이 택시 ‘고젝’을 정식 서비스로 도입했습니다. 현지 사정을 가장 잘 아는 현지 팀에게 의사결정 권한을 준 것, 이것이 바로 그랩이 우버를 이긴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택시 앱을 넘어 ‘슈퍼앱’으로: 생태계를 지배하다
우버와의 경쟁에서 승기를 잡은 그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6년, 그랩은 스스로를 ‘택시 앱’이 아닌 ‘사람들의 일상을 책임지는 슈퍼앱’으로 재정의합니다. 가장 먼저 전자지갑 서비스 ‘그랩페이’를 출시했습니다. 은행 계좌나 신용카드가 없어도 편의점에서 현금을 충전해 쓸 수 있는 이 서비스는 동남아 금융 시장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여기에 음식 배달 서비스 ‘그랩푸드’를 더해, 이동-결제-배달이 서로의 트래픽을 밀어주는 강력한 생태계를 구축했습니다. 소프트뱅크, 도요타 같은 거대 기업들의 투자까지 유치하며 단순한 호출 앱을 넘어 모빌리티, 금융, 생활 서비스를 아우르는 거대한 플랫폼으로 진화한 것입니다. 결국 2018년, 우버는 동남아 사업을 모두 그랩에 넘기고 철수를 결정합니다. 로컬에 대한 깊은 이해가 글로벌 공룡을 이긴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랩의 승리가 한국 시장에 던지는 질문
그랩의 이야기는 더 이상 먼 나라의 성공 신화가 아닙니다. 이미 한국 시장도 카카오,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등 소수의 플랫폼이 우리의 일상을 단단히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욱 강력한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우리 시장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으로 경쟁해야 할까요? 그랩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플랫폼은 정말 한국 사람들의 생활과 소비 습관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해외로 나갈 때, 그랩처럼 집요하게 현지를 파고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기준을 가지고 시장을 바라본다면,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플랫폼 경쟁의 미래를 훨씬 더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