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무대 뒤 거인의 그림자: 한국 유통의 판을 바꾼 한 여인
2025년 가요계를 휩쓴 아이돌 애니의 화려한 무대 뒤편에, 대한민국 유통 역사를 통째로 바꿔버린 거대한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흔히 재벌 3, 4세를 떠올릴 때의 이미지와는 차원이 다른 인물, 바로 신세계 그룹의 총괄회장 이명희 회장입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선대회장이 “내 아들이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며 가장 아꼈던 막내딸이자, 이건희 회장이 ‘장미’라 불렀던 여동생. 그녀는 단순한 재력가를 넘어, 대한민국 주부들의 장바구니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고, 세계 1위 월마트를 무릎 꿇린 ‘유통 전쟁’의 다윗이자 냉혹한 승부사였습니다. 오늘은 2025년의 끝자락에서, 손녀는 무대 위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고 할머니는 무대 뒤에서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였던 신세계의 진짜 주인 이명희와 아들 정용진 회장의 80년 유통 전쟁사를 긴 호흡으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2. 장미처럼 자란 막내딸, 경영DNA에 눈뜨다
시계를 1943년으로 돌려 경상남도 의령, 삼성상회를 이끌던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에게 막내딸 이명희가 태어납니다. 차갑고 엄격했던 이병철 회장이 유일하게 무장 해제되었던 막내딸이었죠. 이건희 회장조차 훗날 그녀를 ‘장미처럼 사랑만 받고 자랐다’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15년간 매일 아침저녁 안부 전화는 물론, 아버지의 셔츠에 직접 핑크색 단추를 달아드리며 세상에 하나뿐인 셔츠를 선물했던 딸. 하지만 단순히 귀여움만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외 출장길이든 골프장이든 아버지를 수행하며 사람을 만나는 법, 결정을 내리는 법 등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했습니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이런 명희를 보며 늘 “이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삼성을 맡겼을 텐데”라며 아쉬워했죠.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평범한 현모양처의 삶을 택했던 그녀에게 1979년, 아버지의 호출이 떨어집니다. “명희야, 백화점 한번 맡아봐라.”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앞으로는 여자도 능력이 있으면 경영을 해야 하는 시대가 온다. 사회에 나가 네 능력을 펼쳐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결국 경영 일선에 나서게 됩니다.

3. 가격 파괴의 선봉장, 이마트 신화와 월마트의 패배
1979년 신세계 백화점에 발을 들인 이명희는 이내 유통 거인 롯데의 위협과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유통업계의 위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7년,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의 타계까지 겹치며 홀로 서야 하는 상황에 처하죠. 상심한 그녀는 잠시 미국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 화려한 백화점이 아닌 창고형 할인점 ‘월마트’와 ‘프라이스 클럽’에 충격을 받습니다. ‘화려한 백화점 시대는 갔다. 이제는 가격 파괴다!’ 그녀는 즉시 귀국해 1993년 서울 창동에 대한민국 최초의 할인점 ‘이마트’를 엽니다. 당시 300원 하던 라면을 100원에 팔아치우는 파격적인 ‘가격 파괴’ 전략으로 이마트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진정한 위기는 1996년 유통 시장 전면 개방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세계 1위 월마트와 2위 까르푸가 한국 상륙을 선언하자 모두들 토종 이마트의 종말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명희 회장은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이 제일 잘 안다’는 지피지기 전략으로 맞섰습니다. 상막한 창고형 매대 대신 밝은 조명과 한국인 키에 맞춘 매대, 주부들이 열광하는 신선식품 코너를 전면에 내세웠죠. 결국 2006년, 세계 최강 월마트와 까르푸는 한국에서 백기를 들고 철수했으며, 그 월마트 코리아를 인수한 것은 다름 아닌 이마트였습니다. 이는 마치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기밀 작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4. 아들 정용진의 혁신과 쿠팡과의 격돌,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마트가 유통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신세계는 또 다른 문화를 심었습니다. 바로 ‘스타벅스’입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사업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 유학 시절 스타벅스 문화를 경험했던 아들 정용진 부회장이 “이건 단순한 커피가 아니라 문화를 파는 것”이라 강력히 주장하며 사업을 살려냈습니다. 어머니 이명희가 은둔형 경영자였다면, 아들 정용진은 ‘인플루언서 경영자’였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노브랜드’, 축구장 70개 크기의 ‘스타필드’, 그리고 ‘SSG 랜더스’ 프로 야구단 인수를 통해 자신만의 ‘신세계 유니버스’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신세계에 2010년대 후반 ‘쿠팡’이라는 저승사자가 나타납니다. 로켓배송으로 무장한 쿠팡과 ‘기저귀 분유 전쟁’까지 벌이며 최저가 맞불을 놓았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판세는 뒤집힙니다. 2023년 쿠팡은 이마트 매출을 뛰어넘었고, 이마트는 창사 이래 첫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2023년 말, 은퇴할 줄 알았던 80세 이명희 회장이 다시 등판해 아들 정용진이 가장 신임하던 임원진 40%를 교체하는 충격 요법을 단행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였죠. 이후 2024년 정용진 부회장은 회장으로 승진하며, 신세계 그룹은 사실상 백화점 부문은 딸 정유경 회장이, 이마트와 스타필드 부문은 아들 정용진 회장이 맡는 ‘두 개의 왕국’으로 나뉘게 됩니다.

5.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신세계의 꿈
쿠팡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휘청였지만, 현재 신세계는 다시 뛰고 있습니다. 이마트 트레이더스와 스타필드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으며, 백화점 부문은 역대 최고 매출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병철 선대회장의 와이셔츠 단추를 달아주던 막내딸은 이제 백발의 총괄 회장이 되어 아들과 딸이 이끄는 거대한 제국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손녀 아이돌 애니가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끼와 대중을 사로잡는 매력은 어쩌면 할머니 이명희 회장이 100원짜리 라면과 스타벅스 커피로 대한민국 소비자의 마음을 훔쳤던 그 동물적인 감각을 물려받은 것 아닐까요? 때로는 냉혹한 승부사로, 때로는 무서운 어머니로, 그리고 대한민국 유통의 역사를 다시 쓴 거인으로. 위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新世界)’을 꿈꾸는 그들의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영감이 되기를 바랍니다.